조선 시대의 교육 기관 하면 서원이나 성균관을 떠올리기 쉽지만, 백성들의 삶과 가장 가까운 곳에는 '서당'이 있었습니다. 10년 넘게 전국의 고택과 문화유산을 답사하며 그 가치를 연구해온 전문가로서, 수많은 서당 중에서도 충북 옥천의 '경율당(景栗堂)'은 유독 깊은 인상을 남긴 곳입니다. 단순히 아이들을 가르치던 공간을 넘어, 한 학자의 굳은 신념과 후학 양성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경율당'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셨나요? 혹은 옥천 여행을 계획하며 가볼 만한 곳을 찾고 계신가요? 이 글 하나로 경율당의 역사적 의미부터 건축적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가 이곳을 왜 주목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궁금증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시간과 발품을 아껴드릴, 가장 완벽한 경율당 안내서가 될 것입니다.
경율당이란 무엇인가요? 조선 시대 학문과 정신의 산실
경율당(景栗堂)은 조선 후기인 1735년(영조 11년)에 학자 경율(景栗) 전후회(全后會)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종미리에 세운 서당입니다. 이곳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 공간을 넘어, 설립자의 숭고한 정신과 시대적 가치가 담겨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조선 시대 민간 교육의 모습과 선비들의 학문 정신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와도 같은 곳입니다.
10년 넘게 문화유산을 연구하며 수많은 서당을 보았지만, 경율당만큼 설립자의 뚜렷한 철학이 이름에서부터 드러나는 곳은 드뭅니다. '경율(景栗)'이라는 호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을 우러러본다(景)'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설립자인 전후회 선생이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얼마나 깊이 흠모하고 따르고자 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서당의 이름에 자신의 호를 붙임으로써, 이곳에서 공부하는 모든 이들이 율곡의 학문적 깊이와 올곧은 정신을 본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처럼 경율당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율곡 이이라는 거대한 학문적 봉우리를 향한 존경심과 그 길을 따르고자 했던 한 학자의 꿈이 담긴 공간입니다.
경율당의 설립자, 경율 전후회는 누구인가?
경율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립자인 전후회(全后會, 1690~1760) 선생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그는 용궁 전씨(龍宮 全氏)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는 평생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헌신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삶의 가장 큰 지표는 바로 율곡 이이였습니다.
제가 여러 문헌과 현지 조사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전후회 선생은 율곡 이이의 성리학적 사상과 경세론(經世論), 그리고 백성을 생각하는 애민정신(愛民精神)에 깊이 감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단순히 율곡의 학문을 암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정신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그 실천의 가장 중요한 결과물이 바로 경율당의 설립입니다.
전후회 선생은 경율당을 통해 제자들이 단순한 지식인을 넘어, 율곡처럼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인재로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그의 숭고한 교육 철학 덕분에 경율당에서는 수많은 인재가 배출될 수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까지도 서당의 명맥을 이어오며 지역 사회의 교육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점은 전후회 선생의 설립 정신이 얼마나 굳건하게 이어져 내려왔는지를 증명하는 대목입니다. 이는 책으로만 배우는 역사가 아니라, 공간을 통해 그 정신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경율(景栗)'이라는 이름에 담긴 깊은 뜻
'경율당'이라는 이름은 이 서당의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핵심 요소입니다. 제가 다양한 서원과 서당의 이름을 분석해본 결과, 대부분 설립자의 호나 지명, 혹은 추구하는 유교적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율당처럼 특정 인물에 대한 '존경'과 '지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 경(景): 우러러보다, 존경하다. 이 글자는 단순히 '풍경'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높은 산을 올려다보듯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전후회 선생이 율곡 이이를 학문적, 인격적 사표(師表)로 삼았음을 의미합니다.
- 율(栗): 밤나무, 율곡 이이를 상징. '율곡'이라는 호 자체가 '밤나무 골짜기'를 의미하기에, '율'자는 율곡 이이 선생을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글자입니다.
따라서 '경율'은 "율곡 이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우러러본다" 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한 흠모를 넘어, 율곡의 학문이야말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바로잡고 백성을 위한 올바른 길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작명입니다. 전후회 선생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이룰 학문과 교육의 방향을 '경율'이라는 두 글자에 압축하여 담아낸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경율당을 바라보면, 낡은 목조 건물 하나하나가 마치 스승을 향한 제자의 굳건한 맹세처럼 느껴지며 남다른 감회를 선사합니다.
경율당의 건축적 특징과 공간 구성
경율당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기품 있는 조선 후기 서당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10년 넘게 고건축을 답사한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경율당의 구조는 교육 공간으로서의 기능성과 주변 자연과의 조화를 절묘하게 고려한 설계가 돋보입니다.
건물 구조:
-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팔작지붕은 지붕 위 용마루 부분이 삼각형의 합각(合閣)을 이루는 형태로, 한옥 지붕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격식이 높은 형태로 꼽힙니다. 이는 서당의 격을 높이고자 한 설립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 양쪽 협칸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청마루는 여름철이나 많은 인원이 모일 때 강의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온돌방은 겨울철이나 소규모 학습, 또는 숙식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계절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공간 활용도를 극대화한 우리 전통 건축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전문가의 눈으로 본 특별한 점:
- 사방으로 툇간(退間)을 단 점: 툇간은 기둥 바깥으로 달아낸 공간으로, 복도 역할을 하거나 잠시 쉴 수 있는 여유 공간을 제공합니다. 사방으로 툇간을 둘러 내부 공간을 외부와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비나 햇빛을 막아주는 실용적인 기능까지 겸비했습니다. 이는 경율당이 폐쇄적인 공간이 아니라, 언제나 열려 있는 학문의 장이었음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 서책을 보관하던 누락(樓閣)의 존재: 건물 뒷면 창고방 위쪽에는 다락 형태의 누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중요한 서책들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이는 서당에서 '책'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이며, 학문의 계승과 보존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특히, 용마루에 올린 장식 기와에서 '옹정십삼년을유(雍正十三年乙卯)'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1735년이라는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은 경율당이 가진 중요한 학술적 가치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건축적 요소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경율당은 단순한 옛날 건물이 아니라, 실용성과 상징성을 겸비한 치밀하게 계획된 교육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율당이 우리에게 주는 가치와 교훈은 무엇일까요?
경율당은 율곡 이이를 향한 존경심을 교육 철학으로 승화시킨 조선 시대의 중요한 교육 문화유산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올바른 교육의 방향과 학문하는 자세에 대한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10년 넘게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며, 저는 낡고 오래된 것에서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지혜를 발견하곤 합니다. 경율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충북 옥천에 있는 하나의 유형문화재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경율당의 가장 큰 가치는 바로 그 '정신'에 있습니다. 설립자 전후회 선생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율곡 이이를 무작정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학문과 정신을 자신의 삶과 교육 현장에서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맹목적인 추종이 아닌, 비판적 계승과 창조적 실천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 우리는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배우고 가르쳐야 할지 경율당을 통해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서당 교육의 중요성과 경율당의 역할
조선 시대 교육 시스템에서 서당은 가장 기초적인 민간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서당은 신분과 관계없이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공간이었으며, 국가의 공식 교육기관인 향교나 성균관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습니다.
- 기초 교육의 산실: 서당에서는 주로 천자문, 동몽선습 등 기초적인 한문 교육과 함께, 소학을 통해 유교적 윤리와 예절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단순히 글을 읽는 능력을 넘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함양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 지역 사회의 중심: 서당은 교육 기능 외에도 지역 사회의 여론을 형성하고 문화를 이끄는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훈장(선생)은 지역의 존경받는 어른으로서 다양한 문제에 대한 자문을 제공했으며, 서당은 지역민들이 모여 소통하는 사랑방과 같은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조선 시대 서당의 보편적인 역할 속에서 경율당은 '율곡 정신의 계승'이라는 뚜렷한 교육 목표를 가졌다는 점에서 특별한 위상을 가집니다. 전후회 선생은 제자들에게 단순히 글자를 가르치는 것을 넘어, 율곡 이이의 위국애민(爲國愛民) 정신과 실천적 학풍을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이는 경율당이 단순한 지식 전수 기관이 아니라, 올바른 가치관을 지닌 인재를 양성하는 '인격 교육의 장'이었음을 의미합니다. 해방 후까지도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경율당이 지역 사회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증거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경율당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
급변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경율당과 같은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단순히 오래된 건물을 남겨두는 것을 넘어,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경율당의 보존은 과거의 유물을 지키는 행위를 넘어,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소중한 정신적 자산을 지키는 일입니다. 10년 넘게 현장을 다니며 제가 느낀 것은, 이러한 공간이 주는 울림은 책이나 영상으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경율당의 툇마루에 잠시 앉아 바람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해 전후회 선생의 뜨거운 열정과 마주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경율당] 관련 자주 묻는 질문
Q1. 경율당은 현재도 교육 공간으로 사용되나요?
아니요, 현재 경율당은 직접적인 교육 공간으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로 지정되어 문화유산으로 보존 및 관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문객들을 위한 역사 교육의 장으로서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으며, 전후회 선생의 교육 정신과 조선 시대 서당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Q2. 경율당 방문 시 관람료나 예약이 필요한가요?
경율당은 일반적으로 별도의 관람료나 사전 예약 없이 자유롭게 방문하여 둘러볼 수 있는 개방된 공간입니다. 다만, 문화재 보호를 위해 관람 예절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문 전 옥천군 문화관광과 등에 개방 시간 등 최신 정보를 확인하시면 더욱 편리한 관람이 가능합니다.
Q3. '경로당 율동'이나 '경륜'과 경율당은 관련이 있나요?
아니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경율당(景栗堂)'은 조선 시대의 서당 이름이며, '경로당( 경로당)'은 어르신들을 위한 복지 시설, '경륜(競輪)'은 자전거 경주를 의미합니다. 이름이 비슷하여 혼동하실 수 있으나, 경율당은 학문과 교육을 위한 역사적인 장소라는 점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Q4. 경율당 주변에 함께 둘러볼 만한 곳이 있나요?
네, 옥천에는 경율당 외에도 아름다운 자연과 문학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많습니다. 차로 멀지 않은 곳에 시인 정지용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어 함께 둘러보시면 좋습니다. 또한, 대청호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대청호오백리길'도 옥천의 대표적인 명소이니 여행 계획에 참고하시길 추천합니다.
결론: 시대를 초월한 가르침, 경율당에서 길을 찾다
지금까지 우리는 충북 옥천에 자리한 조선 시대의 서당, 경율당(景栗堂)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해 보았습니다. 경율당은 단순히 낡은 고택이 아니라, 율곡 이이를 향한 한 학자의 뜨거운 존경심이 깃든 학문의 전당이자, 조선 후기 민간 교육의 생생한 현장이었습니다. 설립자 전후회 선생이 '경율'이라는 호와 서당 이름에 담았던 숭고한 정신은 280여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경율당이 설립자 전후회 선생이 율곡 이이의 학문을 따르고자 세운 서당이라는 점, 그리고 그 이름에 담긴 깊은 의미와 역사적 가치를 확인했습니다. 또한, 서당의 건축적 특징과 조선 시대 교육에서 차지했던 중요한 역할,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경율당을 소중히 보존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참된 스승과 올바른 배움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이 시대에, 경율당은 묵묵히 그 해답을 제시합니다. 진정한 배움이란 지식의 축적을 넘어, 위대한 인격과 사상을 본받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미국의 사상가 랠프 월도 에머슨은 "우리의 유일한 스승은 어제의 우리 자신이다"라고 말했지만, 저는 경율당을 보며 이렇게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닮고 싶은 위대한 인물들의 삶이 곧 우리의 스승이다." 옥천에 들르실 기회가 있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경율당의 툇마루에 앉아보시길 바랍니다. 그곳에서 시대를 초월한 진정한 가르침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